
바다는 잃었지만, ‘카스피해’는 포기할 수 없었다
소련 해체와 함께 카자흐스탄은 사실상 모든 해군 인프라를 잃었다. 흑해·발트해로 나가던 출구는 러시아·우크라이나·조지아 땅이 됐고, “내륙국에 해군이 왜 필요하냐”는 비아냥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겐 러시아·이란·아제르바이잔·투르크메니스탄과 맞닿은 거대한 내해, 카스피해가 있었다. 이 바다 밑에 약 500억 배럴의 석유와 9조㎥ 가까운 천연가스가 잠들어 있다는 추정치가 공개되자, 5개 연안국은 20년 넘게 “호수냐, 바다냐”를 두고 치열한 법적·외교적 싸움을 벌였다.

2018년 아크타우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카스피해는 마침내 ‘특수 지위를 가진 바다’로 규정됐고, 수면은 공동 이용, 해저 자원은 각국 몫으로 나누는 틀이 합의됐다. 이 순간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바다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카스피해 북동부 광구와 이를 연결하는 파이프·탱커 루트, 항만 시설을 지키지 못하면 국가 에너지 안보가 통째로 흔들릴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100달러에 받은 참수리, 카자흐 해군의 ‘입문 교본’이 되다
문제는 해군 경험이 사실상 제로였다는 점이다. 이때 손을 내민 파트너가 한국이었다. 2005년 한국은 카자흐스탄에 퇴역 참수리급 고속정 세 척을 양도하기로 결정했고, 2006년 3월 RK‑031·032·033으로 개명된 이 배들이 카스피해에 도착했다. 가격은 척당 100달러, 지금 돈으로 15만 원도 안 되는 ‘상징 금액’이었다. 사실상 무상 기증에 가까운 이 거래는, 한국이 “바다 입문용 스타터 키트”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방산·외교 파트너십을 키우는 전형적인 K‑방산식 협력 모델이었다.

참수리급은 원래 서해 NLL 최전방에서 북한 고속정을 상대하며 실전 경험을 쌓은 170톤급 고속정이다. 최고 40노트 안팎의 속도와 좁은 해역에서의 기동성, 기관포·기관총 장비는, 불법 어선·밀수·무장보트·테러 위협이 얽힌 카스피해 환경과 의외로 잘 맞았다. 카자흐 해군은 이 “중고 한국제 고속정”으로 불법 무장보트를 단속하고, 해상 시추시설·파이프라인 주변을 순찰하며, 함정 운용·정비·해군 교육의 기초를 하나씩 쌓아 올렸다.

참수리에서 ‘카자흐스탄급’으로… 자국 군함의 모태가 되다
입문용 장비의 가치는 그 자체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교본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카자흐스탄은 참수리 운용 경험과 한국의 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2012년 자체 설계·건조한 ‘카자흐스탄급’ 미사일 고속정을 취역시켰다. 이 배는 이스라엘제 미사일·센서를 통합했지만, 기본적인 선체 형상·기동 개념은 “소형 고속정으로 좁은 카스피해를 지키는” 참수리 운용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즉, 참수리 세 척은 단순 순찰함을 넘어 카자흐 해군이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됐다. 한국에게는 작은 고속정 몇 척의 문제였지만, 카자흐스탄에게는 자국 해군 정체성과 조선 기술의 씨앗을 심는 출발점이었다.

‘바다 없는 나라’가 지키는 것은, 결국 에너지 파이프라인이다
카스피해 북부에는 카자흐스탄이 운영하는 석유·가스전과 이를 육상으로 실어 나르는 터미널이 줄지어 있다. 이 자원은 다시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가스관, 탱커, 철도망을 통해 유럽·중국으로 향한다. 값으로 따지면 연간 수십억~수백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흐름이다.
카자흐 해군의 임무는 “전략 원해에서의 함대 결전”이 아니라, 이 거대한 자원 수송망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다. 참수리급과 그 후손인 미사일 고속정, 연안 경비함들은 카스피해 연안의 시추 플랫폼·부두·해저 파이프라인, 그리고 유조선 항로를 따라 순찰하며, 테러·해적·불법 무장세력이 이 자원을 노리지 못하게 하는 ‘경찰+보안’ 역할을 맡고 있다.

100달러짜리 ‘K-방산 입문 세트’가 남긴 것
카자흐스탄 사례는 퇴역 함정 기증이 단순 우호 제스처가 아니라, 중장기 방산·외교 자산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참수리를 시작으로, 한국은 카자흐스탄과 군사 교육·정비 협력, 정보 교류를 넓혀 왔고, 카자흐 해군은 자국산 고속정을 만들면서도 “참수리 출신”으로 상징되는 한국식 운용 경험을 계속 참조하고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참수리는 필리핀·동티모르·방글라데시 등지에도 넘어가 각국 연안 경비·해군 창설의 ‘첫 교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바다를 지키던 노후 고속정들이 이제는 카스피해·남중국해·인도양에서 각 나라의 해양 주권과 자원 수송로를 지키는 “K‑방산의 전도사”로 변신한 셈이다.
15만 원과 수백억 달러가 만나는 지점
척당 100달러라는 상징 가격으로 넘어간 참수리급의 현재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카자흐스탄 입장에선 수백억~수천억 달러 규모의 석유·가스 자산을 지키는 해군 전력의 씨앗이었고, 한국 입장에선 중앙아시아 핵심국과의 전략 파트너십·K‑방산 브랜드를 동시에 얻는 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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