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브 하나 못 잠가서, 394억짜리 상륙함을 날렸다
지난 7월 화재가 발생한 해군 2600톤급 상륙함 ‘향로봉함’의 공식 조사 결과가 공개되면서, 이번 사고가 철저한 인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연료유 이송 작업 과정에서 안전 장치 역할을 하던 밸브 하나를 닫지 않은 단순 실수가 화재로 이어졌고, 결국 건조비 394억 원이 투입된 군함은 수리 대신 도태 수순을 밟게 됐다.

사고의 시작, 샘플링 밸브를 닫지 않은 채 방치
사고 이틀 전, 기관부 병사 2명은 보조기관실에서 연료유 이송펌프와 연결된 샘플링 밸브를 열어 휴대용 연료통에 연료유를 소량 취출했다. 문제는 여기서 연료를 받은 뒤 반드시 잠가야 할 샘플링 밸브를 그대로 열린 상태로 방치했다는 점이다. 샘플링 밸브는 탱크나 배관 내부의 유체를 시험·정비용으로 조금만 빼내기 위한 장치인데, 이 부분이 열려 있으면 계통 압력이 걸릴 때 약한 고리가 된다.

수칙 무시한 연료 이송, 과도 압력과 에어로졸 분사
사고 당일, 기관부 하사는 연료유 이송 작업을 하면서 정해진 지침인 정유기 사용 대신 이송 펌프를 선택했고, 펌프를 멈추지 않은 채 출구 쪽 밸브를 먼저 차단했다. 이 과정에서 연료 계통 내부에 과도한 압력이 형성됐고, 결국 열려 있던 샘플링 밸브에 연결된 호스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됐다. 파열 지점에서 연료유는 미세 입자 상태의 에어로졸 형태로 강하게 분사되며 주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웠다.

250도 배기 배관에 닿자 폭발성 화재로 번져
보조기관실 내에는 250도 이상으로 달궈진 발전기 배기배관 고온부가 있었다. 에어로졸 형태로 분사된 연료유가 이 뜨거운 금속 표면과 접촉하면서 순간적으로 폭발성 화재가 발생했고, 불길은 주변 전선과 장비, 격벽으로 빠르게 번졌다. 이로 인해 함교, 기관조종실, 승조원 생활구역 등 선체 핵심 구역 다수가 광범위하게 손상됐다.

26살 군함, 사용 연한 남겼지만 조기 퇴역 불가피
향로봉함은 1997년 약 394억 원을 들여 건조된 2600톤급 상륙함으로, 설계 기준 사용 연한 30년을 적용하면 최소 4년은 더 운용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이번 화재로 선체 내부 중요 구역이 심각하게 파손되면서, 수리·재생 비용이 남은 운용 가치보다 더 크다는 결론이 났다. 해군은 손상 장비 복구 비용이 복구 후 활용 가치보다 높아 도태가 불가피하다며 사실상 조기 퇴역 방침을 밝혔다.

만성 인력 부족과 안전 문화 부재도 공범 역할
조사 결과, 단순 실수 뒤에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안전 수칙 경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중간 관리 역할을 맡을 중사가 10개월 이상 공석인 상태에서 경험이 적은 하사 1명이 과중한 연료 계통 업무까지 떠안고 있었고, 정유기 우선 사용 같은 기본 지침이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무시됐다. 체크리스트와 교차 확인 절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작은 실수가 군함 한 척을 잃는 대형 사고로 커졌다.

인명 피해는 막았지만, 승조원 30여 명 부상
참사 와중에도 인명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은 것은 현장 승조원들의 신속한 대응 덕분으로 평가된다. 화재 인지 직후 함장은 즉시 주기관을 정지하고 비상 투묘를 지시해 선박을 고정한 뒤, 학군사관후보생과 승조원을 우선 대피시켰다. 이후 도선사와 핵심 인원들이 끝까지 선상에 남아 진화 작업을 벌여 화재가 탄약고 등 치명적 구역으로 번지는 상황은 막았지만, 하사 1명이 3도 화상을 입고 병사·학군후보생 등 30여 명이 연기 흡입 등으로 치료를 받았다.

밸브 하나가 드러낸 군함 안전의 민낯
이번 향로봉함 화재는 밸브 하나 안 잠근 실수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 뒤에는 안전 수칙, 인력 구조, 교육·점검 체계 전반의 구멍이 겹쳐 있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로 남는다. 샘플링 밸브를 닫았더라면, 정유기를 사용했더라면, 펌프를 먼저 멈추고 밸브를 조작했더라면 394억 원짜리 상륙함은 여전히 현역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군은 재발 방지 대책으로 연료 계통 작업 절차 재정비, 밸브·펌프 조작 교육 강화, 인력 보강 등을 약속했지만, 이미 한 척의 군함과 막대한 예산은 불길 속에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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